전문가칼럼

석탄 냄새 대신 퍼진 고소한 빵의 향기

그곳에선 이제 석탄재의 매캐한 냄새 대신 고소한 빵의 향기가 납니다. 대형 터빈이 돌아가는 윙윙 기계 소음 대신, 신선한 크루아상이 바스락거릴 때 나는 쾌활한 아침 소리가 들려 옵니다.

발전소를 홀린 빵 냄새, 창고에선 문화의 향기

2022년 10월 14일 오픈한 파리바게뜨 영국 1호점, 배터시 파워스테이션점 전경 ⓒSPC MAGAZINE

2022년 10월, 파리바게뜨 영국 1호점이 들어선 곳. 여기는 런던 남부 템스강 연안의 랜드마크, 옛 배터시 화력발전소입니다. 석탄 화력 발전소로서 1933년부터 1983년까지 반세기 동안 런던 전역에 전력을 공급한 곳입니다. 이곳은 대대적 리모델링을 거쳐 영국을 대표하는 쇼핑몰이자 문화공간으로 변모했습니다.

유럽 최대의 애플 지사가 들어왔고, 각종 패션 브랜드와 여러 나라의 먹을거리가 방문객의 눈과 귀를, 입과 코를 모두 즐겁게 합니다. 런던의 주말 나들이 명소입니다.

미식, 패션, 트렌드의 중심이 된 배터시 화력발전소

배터시 화력발전소는 필자를 포함한 전 세계의 록 음악 팬들에게도 명소입니다. 이 건물 위로 우뚝 솟은 높이 103m짜리 굴뚝 네 개는 애비로드의 건널목, 웸블리 스타디움의 아치만큼이나 상징적인 ‘음악 성지’의 표지판입니다.

영국 런던 템스 강을 마주하고 있는 상징적인 건물과 랜드마크인 배터시 발전소

1960,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의 기수였던 영국 그룹 핑크플로이드의 명반 가운데 ‘Dark Side of the Moon’ ‘Wish You Were Here’ ‘The Wall’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명작, ‘Animals’의 저 유명한 앨범 표지를 가득 메운 그림이 배터시 화력발전소 건물이었으니까요.

어쨌든 이곳은 이제 더 이상 스모그를 분출하는 2차 산업의 상징물이 아닙니다. IT, 미식, 패션의 트렌드가 모이는 플랫폼으로 멋지게 변모했습니다. 공장, 폐발전소 같은 옛 산업시설이 카페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일은 근래 몇 년 사이 공간과 건축의 새로운 흐름으로 확실히 자리 잡았습니다.

오래된 발전소 터에서 울려 퍼진 낭만,
헬싱키 ‘플로 페스티벌’

필자는 북유럽 문화의 광팬입니다. 오딘과 토르가 등장하는 노르딕 신화, 핀란드의 독자 신화인 칼레발라부터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의 노르딕 누아르(북유럽 범죄물) 소설이나 드라마까지…. 10여 년 전부터 빠져든 서늘하고 이국적이며 창의적인 그들의 문화 때문에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에 여러 차례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좌)노르웨이 베르겐의 피오르 풍경 / (우)스웨덴 스톡홀름의 도시 전경 ⓒUnsplash

노르웨이 서안 도시 베르겐의 아름다운 피오르와 고성, 북구의 베니스라 불리는 스톡홀름의 수변과 야경은 눈만 감아도 떠오를 정도로 제가 좋아하는 풍경들입니다. 하지만 핀란드 헬싱키의 폐발전소 터, 수빌라티도 ‘최애’ 후보로 꼽습니다. 20층 건물 높이로 치솟은 수빌라티의 2개의 굴뚝은 북유럽판 ‘배터시 발전소’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 헬싱키에 버려진 옛 발전소 터인 수빌라티에서 열린 ‘플로 페스티벌’ ⓒFlow Festival 공식 홈페이지

핀란드 헬싱키에 버려진 옛 발전소 터인 수빌라티에서 열린 ‘플로 페스티벌’ ⓒFlow Festival 공식 홈페이지

이곳은 매년 여름 9만여 명이 몰려드는 대형 음악 축제 ‘플로 페스티벌(Flow Festival)’의 장이 됩니다. 오래된 발전소 곳곳에 남아 있는 철제 구조물에 예쁜 조명과 미술 솜씨를 덧대면 완벽한 축제의 장으로 변신합니다. 몇 년 전 그곳에서 직접 본 전자음악 선구자 테리 라일리, 그룹 탠저린 드림, 싱어송라이터 샤를로트 갱스부르의 공연은 잊을 수 없는 ‘음악 액자’가 돼서 제 기억의 박물관에 당당히 걸려 있어요. 수빌라티의 이색적인 분위기와 어우러져서요.

시간을 리모델링하다:
공장에서 문화의 성지가 된 도시들

우리나라에도 이런 공간이 적잖습니다. 서울 성동구 성수동, 영등포구 문래동의 많은 카페와 문화 공간이 피혁 공방이나 철공소의 역사를 품고 새로운 비전, 신선한 향기를 피워 올리고 있죠. 이젠 전국 어느 곳을 가든 원도심이나 해안에 각종 창고나 공장을 개조한 문화공간을 찾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얼마 전 방문한 경북 포항의 ‘동빈문화창고1969’도 이채로웠습니다. 옛 수협 냉동창고를 개조한 복합문화공간인데 오래된 냉동고나 기계장치가 첨단 미디어아트와 배치돼 뿜어내는 독특한 아우라(aura)가 보통이 아닙니다.

부산 복합문화공간 ‘F1963’ 전경 ⓒVISIT BUSAN

부산 복합문화공간 ‘F1963’ 전경 ⓒVISIT BUSAN

1970년대 정미소 건물을 리모델링해 카페로 재탄생한 성수동의 ‘대림창고’ 프로젝트 이후, ‘대형’ 옛터의 ‘대형’ 리모델링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근래엔 옛 고려제강 공장을 새로 단장한 부산의 복합문화공간 ‘F1963’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짐작하셨겠지만 F는 ‘Factory’의 약자, 1963년은 그 공장이 문을 연 연도입니다.

기숙사에서 차고까지,
과거의 삶이 머물던 공간의 화려한 변신

크고 뻥 뚫린 공간만 ‘변신’의 무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해 성수동에 개관한 ‘성수나무’는 1960년대 공장 기숙사 건물을 개조한 전시장입니다. 중정에는 수령이 거의 백 년 된 나무가 서 있어서 운치가 남다릅니다.

(좌)1960년대 공장 기숙사를 개조한 전시장 ‘성수나무’ ⓒ성수나무 네이버 플레이스
/ (우)조명과 책, 커피가 어우러진 ‘차고라’ 내부 전경 ⓒ차고라 공식 인스타그램

마포구 합정동에 탄생한 ‘차고라’는 오래된 주택의 차고(garage)에 광장(agora)을 결합한 작명입니다. 이곳은 이사무 노구치 등 20세기 조명 장인들의 작품이 빼곡한 공간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 읽고 쉴 수 있는 문화 공간입니다.

이렇게 리모델링된 2차 산업 공간들은 어떤 매력으로 우리를 끌어당기는 걸까요. 지금은 눈 깜짝할 새 내가 알던 곳의 간판이 바뀌는 시대, 더 나아가 이를 극단화한 ‘팝업스토어’의 시대잖아요.

넘쳐나는 ‘찰나의 간판들’이 주는 공허함을 역사성으로 치환하는, 레거시(legacy·유산)의 아우라(aura)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물성의 매력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벽과 천장이 드러내는 거친 질감, 굴뚝이나 골조가 보여주는 압도적 실루엣 같은 것들요.

영국 템스강에서 맛보는 파리바게뜨 크루아상의 단상

언젠가 다시 유럽을 찾는다면 배터시 화력발전소에 빵 냄새를 맡으러 가고 싶습니다. 파리바게뜨는 현지에서 어떻게 인식될까요? 영국에 건너온 프랑스 베이커리로 인식될까요, 아니면 요즘 가장 뜨거운 문화 강국 한국에서 온 빵집으로 알고 있을까요. 한 덩이 사갖고 나와 템스 강을 바라보며 크루아상 한 입 와삭 베어 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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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생크림, 쉬폰 케이크를 맛보는 영국 고객들 ⓒSPC MAGAZINE

“Where are you from?”
어떤 친절해 보이는 행인이 제게 물으면 빙긋이 웃어 보일까 봐요.
“저는 고풍스러운 건물, 고전의 향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핑크 플로이드를 좋아하고요. 당신처럼 프랑스식 빵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임희윤 뮤직 큐레이터 · 문화평론가 · 음악 전문 통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