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더울 때는 이열치열이고 뭐고 얼음 한 조각 입에 넣어 땀부터 식히는 게 상책입니다. 그래서 동서고금 가릴 것 없이 다양한 얼음 음료가 발달했으니 동양에는 우리 빙수를 비롯해 일본식 빙수 카키고오리(かき氷), 중국 빙수 바오빙(薄餅)이 있습니다. 서양도 아이스크림만 있는 것이 아닌데요. 동양처럼 샤베트와 슬러시를 비롯해 그리스의 프라페, 이탈리아 그라니따 등등 다양한 여름 아이스 디저트를 즐겼습니다. 샤베트와 슬러시는 얼음과자 형태로 진작부터 친숙해졌고 프라페는 변형된 얼음 음료가 우리에게 알려졌지만 그라니따는 최근 소개됐기에 낯선 느낌이 없지 않습니다. 어떤 아이스 디저트일까요?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유래한 아이스 음료 그라니따
그라니따(Granita)는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남국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시칠리아(Sicilia)에서 유래했는데 커피나 과일 시럽 등을 얼려 만든 슬러시 위에 젤라또 아이스크림을 비롯해 갖가지 과일 혹은 견과류와 스낵을 토핑으로 얹어 먹는 아이스 음료입니다. 얼핏 유럽의 여타 아이스 디저트와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유래를 알고 보면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만만한 얼음 음료가 아닙니다. 다양한 유럽 디저트 중에서도 손에 꼽는 유서 깊고 전통 있는 아이스 디저트이기 때문인데 다양한 의미에서 ‘최고’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습니다.
먼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으니 그래서 최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인 9세기 무렵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에서 발달했습니다. 슬러시는 현대식 제빙기가 나온 이후 생긴 20세기 아이스 음료이고 프라페는 19세기 그리스에서 등장했으며 한국에서는 주로 아이들 음료로 취급받는 샤베트가 프랑스 궁정에 등장한 것은 17세기 무렵입니다. 그러니 9세기 무렵에 생겨난 그라니따는 유럽의 아이스 디저트 중에서도 가장 유서가 깊은 맏형 격이죠.
그런 만큼 이탈리아에서도 일부 상류층에서만 맛볼 수 있는 최고급 아이스 음료였습니다. 겨울이 아니면 눈과 얼음을 구경조차 할 수 없던 1,200년 전에, 평소에는 겨울에도 눈도 내리지 않고 얼음도 얼지 않는 남국 시칠리아에서 생겨난 아이스 디저트였으니 재료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시칠리아 섬 동부에 위치한 에트나 화산
그라니따를 만들 때 들어가는 얼음은 시칠리아 섬 동부에 위치한 에트나(Etna) 화산에서 가져왔습니다. 에트나 화산은 해발 약 3,350m의 산으로 유럽에서는 알프스 이남에서 제일 높은 산입니다. 게다가 지금도 유럽에서 제일 활발하게 활동하는 활화산인데요.
한 마디로 뜨거운 산인데 이런 산 정상에 겨울에만 잠깐 쌓이는 눈을 채취해 서늘한 동굴에서 화산재와 짚으로 덮어 저장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등짐으로 실어 날라 그라니따를 만들었습니다. 남국에서 얻기 힘든 소중한 눈으로 만들었으니 귀하기도 했거니와 뜨거운 화산에 쌓인 눈을 화산재로 보관했다가 사용하기에, 빙질이 아이스 디저트로는 최고라는 게 시칠리아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어쨌거나 그라니따는 이렇게 어렵게 구한 에트나 화산의 눈을 갓 짜낸 사탕수수즙과 신선한 레몬즙에 섞은 후 여기에 꿀과 각종 허브 및 향신료를 혼합하고 그 위에 아몬드나 헤이즐넛, 피스타치오 같은 각종 견과류, 혹은 말린 무화과나 건포도를 토핑으로 얹어 여름 아이스 디저트로 만들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사탕수수즙과 레몬즙에 에트나 화산의 귀한 눈 덩어리를 녹여 만든 그라니따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그래봤자 에트나 화산의 설빙 말고는 특별한 게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9세기 때로 돌아가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중세 유럽에서 하얀 금가루로 불렸던 설탕을 만들 수 있는 사탕수수즙과 황금 열매로 여겼던 레몬즙에 에트나 화산의 귀한 눈 덩어리를 녹여 만든 것이 그라니따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시칠리아를 지배했던 아랍이 이 무렵 유럽에서는 처음으로 시칠리아에서 사탕수수와 레몬을 재배하기 시작했기에 가능했습니다. 게다가 토핑으로 얹은 아몬드나 피스타치오 등의 견과류 역시 중세 유럽에서는 아랍에서 수입한 고가의 견과류였으니 그라니따에 들어가는 재료 하나하나가 황금 덩어리 이상의 가치를 지닌 디저트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시칠리아에서는 그라니따를 기적의 음료, 영원의 생명수(Elixir)로 불렀습니다.
고대 페니키아(Phoenicia)의 옥사리나라는 공주가 사랑하는 낭군을 찾아 시칠리아 섬에 왔습니다. 그리고 더운 여름 에트나 화산에서 날라 온 눈을 과일 시럽에 꿀과 함께 녹여 마시고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작위적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전설이지만 자세히 보면 시칠리아를 중심으로 한 지중해 무역과 지배의 역사, 시칠리아의 부가 만든 그라니따에 대한 자부심이 녹아 있습니다.
참고로 시칠리아에서 그라니따를 먹는 전통 방법 한 가지. 버터를 듬뿍 넣어 구운 빵인 브리오슈나 달달한 패스트리에 카푸치노 대신 차디찬 그라니따를 한 스푼 듬뿍 얹어 먹습니다. 한 입 베물면 차가운 기운이 온몸을 감싸며 뜨거운 햇빛을 무력화시키니 생명수가 몸속에 들어 온 기분을 맛볼 수 있습니다.




